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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생각 디다보기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하병두 2011. 1. 31. 13:38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난 오늘 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서프라이즈 / 명덕 / 2011-01-31)


언젠가 우연히 박노자 선생을 만나 몇 명의 지인이 담소하면서 차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받은 인상은 언어감각도 뛰어나고 재능도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독특한 면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늘 그가 쓰는 글 속에 드러나는 좀 (긍정적 의미에서) 엉뚱한, 그러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관점’을 관심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이해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의 다양성, 바로 그것이 자유이고, 사상의 유연성이고,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의 수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출생해 교육받고 또 전혀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민족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역사가 아닌, 어쩌면 그것까지 포괄해서 또 다른 ‘역사’를 공부했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다. 늘 새로운 시각에서 우리가 망각했던, 그러니 나로서는 최소한 좁고 편협한 민족적 역사적 관점을 벗어나 보편적 관점으로 나 자신의 정신적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긍정적 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 긍정적 힘’을 가진 박노자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해하는 또 다른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날 지하철에서 서로 헤어지면서 내가 전공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중고등 시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를 승인했다”는 것밖에는 배우지 못했다는 고백을 듣고 놀랬던 기억을 그는 나에게 남겨주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윤리학을 왜 내가 공부하지. 왜 맑스가 <자본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위대한 철학자로 꼽았을까? 역시 공부는 편협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과연 우리가“한국군인 짱입니다!”라고 환호만 해야 하나?

좀 서두가 길었다. 박노자가 오늘 한겨레 칼럼(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61354.html)에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라는 제목을 달아 자못 도발적이면서도 심각한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자극은 제목 자체가 불러 일으켰다.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던 그 시절의 고상한 질문으로 남아 있던 물음, 그래도 지금도 가끔은 한쪽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군밤을 끄집어내어 깨어 물듯 써먹는 철학적 물음, 이젠 익숙하다 못해 너무도 자명했던 그 물음을 되짚어 본다.

보수도 진보도 가리지 않고 ‘아덴만 여명’ 작전의 ‘대성공’에 들떠 있는 현상에 대한 질타였다. 왜 진보까지 ‘해적 소탕 성공’ 찬사를 보내느냐는 것이다. 단편적이고 일면적으로 반응하는 ‘민심’에 덩달아 수반하면서 “‘주류’와 질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느냐고 우리를 일깨운다. 이런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노골적으로 대한민국 민심을 향해, 그 정수리를 향해 화살을 꽂는 발언을 하는 인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사실은 좀 다를 수 있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 “아니오” 하는 인사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이번 사태에 관련된 몇몇 부정적인 측면을 기사화하고, 분석하고 앞으로 발생할 더 심각한 사태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있었던 것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박노자같이 명석한 사람이 간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언가 우리 사회에 이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진보를 자처하는 입장에 서는 사람들의 역할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순박한 민족주의적 심리”, “한국인들의 비이성적인 기쁨”에 매몰되어 “살해당한 이들에 대한 기본적 측은지심도 저버린 이 반인륜적인 ‘국민적 환희’”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도덕적 양심을 저버린 비도덕적 행위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아무리 비도덕적인 사회라고 할지라도,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부르짖는 대변자로서, 도덕적 인간으로서 마땅히 내세울 만한 논리로 여겨진다.

역발상 해서, 왜 살해당한 인간의 입장에서 그들이 왜 그런 짓에 참여하고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그들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귀중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억울하게 죽어갔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의 입장과 형편을 되돌아보며 반성하지 않는 것은 ‘보편적 인간’으로서 도덕적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런 해적질에 나서게 했을 그 필연적인 역사적 연관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박노자는 이렇게 묻는다.

“같은 국내인이 극단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인질 범죄를 범하게 된다면 우리는 통상 그 범죄에 대한 당연한 공분과 함께 빈민을 범죄자로 만든 딱한 사정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당연히 느낀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류애의 차원에서는 비록 국내인을 상대로 범죄를 벌인 외국인이라 해도 같은 시각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해적질을 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절박한 현실, 그들이 당면한 소말리아라는 한 국가의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현실, 내우외환에 끝없이 시달려야 하는 살해당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아픔과 고통, 외국인에게 어장을 빼앗겨 버린 삶의 현장을 도외시하고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라고 우리에게 박노자는 되묻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해적의 소탕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해적질로 나서지 않을 삶의 방편을 마련해 주자고 하는 것이 국제적 공동의 모색을 통해 소말리아 어부들을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호소하는 것이 인도적이고, 도덕적이고, 해적 소탕보다 더 나은 좋은 방책이 아니겠는가? 싸우지 않고 이기고,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들을 구원하고 우리의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서도 다 나은 일이 왜 아니겠는가?

▲ 압송되는 소말리아 해적 ⓒ부산해양경찰청

박노자만이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인류애, 박애주의 정신일까? 그런 박노자가 말하는 인류애를 우리 모두가 나눠 갖지는 못할 것인가?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비일비재하다. 폭력을 당해 본 자들이 더 폭력적일 수도 있다. 전쟁의 참화를 겪어 본 사람이 전쟁을 하자고 용기 아닌 만용을 부리고, 피를 피로 응징해야만 ‘만족’하는 자학적 증세를 가진 사람의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목도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일 수 있다.

그래서 박노자는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살인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승리해서 돌아오는 군을 장례식을 치르듯이 맞이하라”고 했다는 <도덕경(31장)을 인용한다. 노자는 물론이고, 묵자, 맹자도 세상 사람들이 전쟁을 불의라 하지 않고 찬양하는 태도를 비난했다. 묵자의 겸애(兼愛)의 정신은 우리에게 망각해 버린 도덕적 사치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리 현대가 경쟁의 시대이고 경쟁만이 유일한 가치의 척도라고 할지라도, 전쟁을 비난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박노자의 논조에 우리가 굳이 동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민족적 이익보다 보편적인 인류애에 바탕을 둔 인도주의 정신이 박노자의 글 속에 깔려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한국인 동료로부터 수없이 지독스럽게 닥칠 저 무서운 비난을 무릅쓰고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고 ‘도전적으로’ 우리에게 아주 조금밖에 드러나지 않은 양심의 자아를 향해 무섭도록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나 자신에게도, 또 우리 모두에게도 기분 나쁜 말일 수 있다. ‘네가 도대체 인간이냐?’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는가? ‘인간이 인간인 한 아름답다.’라는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한국인치고 이 말을 듣고 감정이 상하고, 속상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하고 우리 주변을 직접 마주하며 둘러보아야 한다.

베트남에, 필리핀에, 욕망에 사로잡혀 남겨둔 우리의 그 위대한(?) 편견에 가득 찬 씨앗(sperm)인 피붙이들을 돌아보면서 반성해야 한다. 필리핀에 남겨둔 만 명이 넘어선다는 ‘코피노’들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가인가 개인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이다.

주위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지하철에 항상 마주하는 조금씩 피부색 다른 인간들을 우리는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의 고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종교적 원죄적 죄의 고백일 수도 있다.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어야 할 자비심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 피부색과 무관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과연 남아 있는가?” 그때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긍정적 답변을 끄집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임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좋은 말은 듣기에 거북하고 좋은 약은 입에 쓰기 마련이니까.

 

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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